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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고구려 유리왕과 황조가 해명태자와 무휼의 이야기.


      애초로운 유리왕의 황조가


  고구려의 궁에서는 성대하게 연회가 베풀어졌다. 다물도왕 송양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예씨 부인과 유리가 동부여에서 동명성왕을 찾아온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자리였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송양은 동명성왕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한참 술잔이 돌았을
때 송양이 슬쩍 운을 떼었다.
  "유리왕자는 사나이답고 기백이 있소. 예절도 깎듯하고. 앞으로 왕이 되면 나라를
잘 다스리겠소."
  송양이 남다르게 유리왕자를 관찰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송양에게는 혼기가 찬
딸이 있었다. 동명성왕은 송양의 말을 무심히 듣지 않고 송양의 딸을 유심히 보았다.
외모도 아름다운 데다 예절도 아주 발랐다.
  "허허, 칭찬이 과하십니다. 보아하니 댁의 따님도 우리 아들 못지 않게 뛰어난 것
같은데요."
  동명성왕은 송양에게 술을 한잔 권하고 은근하게 말했다.
  "우리 사돈을 맺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좋은 날짜를 잡아 결혼식을 올리시죠."
  송양은 기꺼이 응하며 동명성왕에게 술을 한잔 따랐다.
  곧 둘의 혼인 날짜가 잡히고 유리와 송씨의 결혼식이 있었다. 송씨와 유리는 아주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동명성왕은 유리가 온 지 5개월 뒤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명성왕의 뒤를 이어 유리태자가 왕이 되었다. 송씨도 자연히 왕후가 되었다.
송씨는 성품이 온화하고 다정다감했다. 그러나 몸이 약해 그것이 근심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결혼한 지 1년 3개월
되는 해 송비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장남 도절이었다.
  유리왕은 그 후 화희와 결혼을 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 유력자의
집안과 혼인을 맺은 것이다. 화희는 고구려의 자치구 중의 하나인 골천에서 시집온
여자였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고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유리왕에게도 애틋하게
했다. 그러나 유리왕은 화희를 마음 속 깊이 좋아할 수가 없었다. 유리왕은 아직
사랑했던 송비를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유리왕은 마음을 달래려 가끔 사냥을 떠났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비류수
강가에 이르렀다. 유리왕은 거기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 순간
유리왕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치 송비가 다시 살아와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송비와 아주 닮은 여인이었다.
  유리왕이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유리왕은 그녀가 사라질까봐 얼른 붙잡았다.
  "도망가려 하지 마시오. 나는 고구려의 유리왕이오.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소."
  "치희라고 하옵니다."
  치희는 올해 나이 열여덟이라고 한인이라고 했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한나라
사람들을 무척 천하게 여기고 있었다. 한인들은 자기 나라를 떠난 망명인이었던
것이다.
  유리왕은 그녀를 따라가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 후궁으로 삼고 싶다는 말에
치희의 아버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딸을 먼 타국에 시집보내는 것이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러나 왕께서 이렇게 직접
오셔서 청하시니 기쁘게 보내겠습니다."
  치희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온 다음부터 유리왕은 마음을 잡기 시작했다. 주위의
대신들도 한시름을 놓았다. 유리왕은 치희를 극진히 사랑하여 매일 그녀를 찾았다.
  먼저 후궁이 된 화희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점점 치희에
대한 질투와 미움이 생겨났고 치희를 아주 차갑게 대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유리왕이 치희를 찾아갈 때마다 치희는 눈물로 자기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화희 때문에 너무 힙듭니다. 낯선 이 나라에 와서 왜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요."
  치희를 만나고 오는 날은 유리왕은 울적해졌다.
  그래서 화희에게 치희에게 잘해주라고 하면 화희는 치희만 두둔한다 하여 목놓아
우는 것이었다.
  두 여인이 자주 싸우자 유리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떨어져 살게
했다. 그래도 둘 사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화희는 치희에게로 마음이 기우는 유리왕을 볼 때마다 불안하였다.
  "왕이시여, 한인들은 교활하여 언제 우리를 해칠지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한인 계집을 그렇게 끼고 도시다니요. 왕은 백성을 다스리는데 전력해야
하거늘 어찌 한인 여자에게 빠져 계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치희를 더 사랑하는 유리왕은 화희의 말이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너무 걱정마오. 내가 어찌 한 여자만 사랑하겠소. 한인들이 교활하다 하나 치희는
그렇지 않소."
  유리왕이 치희를 감싸고 돌자 화희의 질투심은 더욱 불타 올랐다.
  어느 해 봄, 유리왕은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기산 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왕의 뒤를
활과 칼, 차와 방망이를 든 부하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누비면서 하늘을 나는 새를 쏘아 맞추고 뛰어 달아나는 동물을 잡았다. 이
사냥을 하는 행사를 통하여 고구려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용기를 키워주려는
것이었다.
  군사들은 사냥을 즐거워하여 7일 동안 이루어졌다.
  유리왕이 사냥을 나가 있던 동안에 화희와 치희는 아주 크게 싸웠다. 왕이 나가
있는 동안 한번도 화희가 있는 궁에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는 치희를 괘씸하게 생각한
화희는 시녀를 시켜 치희를 불러오게 했다. 그러나 치희는 화희가 몇 번이나 부른
후에야 겨우 화희 앞에 나타났다. 화희는 불쾌했다.
  "어찌하여 불러도 얼른 나타나지 않는가? 왕의 귀여움을 받는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너는 고구려의 여자도 아니고 한인의 종자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이토록 무례하게 구느냐."
  치희는 한인이라고 깔보는 화희의 말을 듣고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그녀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내 어찌 이런 모욕을 받고 여기 머문단 말인가. 친정으로 가야겠다."
  유리왕은 많은 사냥감을 들고 기뻐하며 돌아왔다 오자마자 바로 치희의 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왕을 반기며 달려나올 치희의 모습은 아무 데도 없었다. 왕은 곧
궁으로 들어와 화희에게 물어보았다.
  "치희에게 '한인의 천한 계집이 버릇이 없다.'고 하였더니 그 말을 듣고 집을 나가
버렸나 봅니다."
  유리왕은 잡아온 사냥감을 대신들에게 나누어주고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마음
속으로 치희 생각이 간절했다. 그 다음 날 또 수렵을 떠날 채비를 하자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특히 늙은 정승 협보가 강력하게 말렸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여러 날 수렵에 나가 나라 일을 돌보지
않으시다니요. 그러면 백성들은 왕을 믿지 못하게 되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수렵 다녀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떠나십니까?"
  왕은 그러나 협보의 말을 듣지 않고 혼자 나와버렸다. 왕은 지금 사냥을 가려는
것이 아니고 치희한테 가려는 것이었다. 말을 달려 치희의 집으로 갔다.
  "치희야, 너는 나의 마음을 모르느냐? 내 제일 먼저 너를 보러 갔건만 네가 없어
몹시 상심했었다. 나와 함께 돌아가자"
  치희는 왕의 말을 듣자 눈물이 송글송글 맺혔다.
  "왕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어이하여 그런단 말이냐?"
  "더 이상 화희의 괴롭힘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내가 그대 곁에 있으니 아무 염려 말아라."
  "아니옵니다. 저에 대한 욕이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천한 한인
계집이라며 한인을 모욕하였사옵니다."
  "그대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느냐?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게 하겠으니 나와
함께 가자, 치희야."
  "화희를 내쫓는다면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까?"
  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느니라."
  "그렇다면 가지 않겠습니다."
  왕이 치희를 보니 입술을 꼭 깨물고 단호한 표정이었다. 도저히 뜻을 꺾을 수 없어
보였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유리왕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뜻을 돌이킬 수 없겠구나. 나는 여기서 돌아가야겠다."
  왕은 쓸쓸히 궁을 향해 말을 돌렸다. 화창한 봄날이었다. 봄볕에 취해 잠시 머물던
유리왕은 꾀꼬리 소리를 들었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황금빛을 반짝이며
꾀꼬리들이 짝을 지어 훨훨 날고 있었다. 그것을 본 왕은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꾀꼬리를 한참 바라보던 왕은 시 한 수를 지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쌍쌍이 노닐건만
  외로운 이 내 몸은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이것이 유리왕의 애처로운 황조가이다.


      해명태자 부왕의 미움을 받아 죽다

  유리왕은 서기전 9년에 선비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전 3년에는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 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한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왕망은 고구려를 하구려후라고 깎아내려 말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입하였으나 크게 이겼으며 이듬해에는 양맥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왕이 성을 쌓고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을 때 해명태자는 부왕을 따라 가지
않고 옛 서울인 졸본성(환도성)에 머물러 있었다.
  졸본성 옆에는 황룡국이 있었다. 황룡국에서는 고구려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황룡국에서는 해명태자가 졸본성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태자의
환심을 사고자 활을 하나 보내왔다. 그 활은 시위를 당기려면 아주 센 힘이 필요한
강궁이었다. 해명태자가 활을 만져보고 시위를 당기어 보니 과연 강궁이었다.
  "우리나라 왕이 힘이 세다는 태자의 소문을 듣고 칭찬하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옵니다. 받아주십시오."
  사신은 말을 아주 겸손하게 하는 듯했으나 태자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태자는 그
시선이 매우 불쾌하게 느껴졌다.
  '저들이 나의 용맹을 시험해 보려고 활을 보냈는가? 마치 비웃는 듯하구나.'
  태자는 활을 잡았다.
  "어디 얼마나 활이 강한지 봅시다."
  태자는 사신 앞에서 잇는 힘껏 활을 휘어 꺾었다. 활이 뚝하고 부러졌다. 부러진
활을 보며 태자가 말했다.
  "천하게 둘도 없는 강궁을 보냈다더니 겨우 이 정도요."
  사신은 무안해 하며 돌아갔다.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신하가 걱정하며 말했다.
  "사신을 저렇게 돌려 보내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러나 나를 시험하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좋게만 해서 보낼 수 있겠소? 고구려를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리한 것이오."
  다녀온 사신의 말을 전해 들은 황룡국왕은 분해 했다.
  '고구려 태자가 용맹하다더니 과연 대단한 인물이구나. 그가 왕이 되면 우리나라도
위험하겠다.'
  해명태자가 황룡국에서 보낸 활을 부러뜨렸다는 소식은 곧 유리왕에게도 들어갔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황룡국의 왕이 유리왕에게 사신을 보내왔다.
  "태자가 새로 즉위했을 때 우리 황룡국에서 활을 보냈습니다. 우리 황룡국은
고구려와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해서 축하하려고 보냈는데 태자는 무례하게도 그 활을
꺾어버렸습니다. 그 일로 국왕은 고구려를 칠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그 일이 그렇게 황룡국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니 면목이 없소. 황룡국왕에게
사죄하는 뜻으로 태자를 보내도록 하겠소."
  그해 3월 황룡국에서는 태자를 만나보자고 청해 왔다.
  태자가 쾌히 응하자 주변의 신하가 만류했다.
  "이상하옵니다. 얼마 전에 사신이 화가 나서 돌아갔는데 초청이라뇨? 뭔가 다른
일을 꾸미는 게 틀림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여 피하란 말이오. 고구려의 태자로서 그럴 순 없소.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소."
  태자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하였다.
  태자는 홀로 말을 타고 황룡국으로 떠났다. 황룡국왕이 보니 듣던 바대로 당당했다.
잘생긴 얼굴이었으나 눈매가 매서워 보였다. 또한 몸이 단단해 보여 힘이 아주 센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듣던 바대로 훌륭한 풍채시오."
  황룡국왕은 해명태자를 위해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었다.
  "산천을 구경하시고 사냥이나 하면서 마음 편히 놀다 가시오."
  황룡국왕은 사냥을 하다 기회를 보아 해명태자를 해치라고 했다.
  "해명태자같이 뛰어난 인물이 나중에 고구려 왕이 되면 우리나라에 좋지 않소.
게다가 해명태자는 고구려에서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기서 죽여도 항의가 없을
것이오."
  그러나 해명태자의 용맹스러움에 기회를 매번 놓치고 말았다. 황룡국왕이 그 일로
고심하자 한 신하가 말하였다.
  "태자를 우리가 죽이지 말고 돌려보내 그 나라에서 죽이도록 하심이 어떨까요. 이미
태자는 자기 나라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유리왕은 해명태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황룡국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해명태자가 돌아가는 날 그에게 은근하게
말하였다.
  "부왕께서 태자를 우리나라에서 죽여도 좋다고 하셨소. 그러나 내가 태자를 보니
죽이기가 아까워서 그냥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부왕께 용서를 빌도록 하시오."
  무사히 고구려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해명태자는 한편으론 우울했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신하들과 백성들은 아주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유리왕은
기뻐하지 않았다. 유리왕은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길 때 따라오지 않고 해명태자가
졸본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을 자신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했다. 해명태자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 일을 계기로 아주 커져 있었다.
  유리왕은 해명태자가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앞으로 사신을 통해서 편지를
보냈다.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을 때 따라오지 않아 나의 뜻을 거역하더니 황룡국과의
일도 경솔히 행동하여 이웃나라와 원수가 되게 하고 부왕의 면목을 잃게 하였으니
아들 된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편지를 끝까지 읽던 해명태자의 얼굴이 파래졌다. 편지 속에는 칼이 들어 있었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었다. 태자는 칼을 집어들었다. 옆에 있던 신하들이
말렸다.
  "아무리 부왕의 명령이라 하여도 경솔히 목숨을 끊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태자는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분이옵니다. 태자를 모함하려는 무리들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왕이 마음을 바꾸실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해명태자는 더욱 칼자루를 굳게 잡을 뿐이었다.
  "칼까지 넣어 보내신 분이 마음을 바꿀 리가 없소. 가뜩이나 부왕의 속을 상하게
하여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또 명을 거역할 수는 없소. 장부답게 깨끗하게 죽겠소.
말리지 마시오."
  태자는 곧 여진의 동원이란 넓은 들로 나갔다. 예전에 자신이 즐겨 다니던 곳을
보니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해명태자는 눈물을 삼키고 국내성 쪽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절을 했다. 그리곤 창을 땅에 꽂고 말을 가져오라고 신하에게 명령했다.
  신하가 울면서 말을 가져오자 한 번 주위를 둘러본 후 말에 올라 거칠게 말을
몰았다. 그리곤 땅 위에 꽂혀진 창위로 뛰어내렸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해명태자가 죽고 난 후 유리왕은 태자의 예를 갖춰 동원에 장사를 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해명태자가 창에 찔려 죽은 벌판은 그를 기리기 위해서
창원이라 불렀다.


      용기있는 신동 왕자 무휼

 
유리왕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셋째 아들인 무휼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
  고구려가 점차 강해지는 것을 본 부여왕은 고구려가 못마땅했다.
  유리왕 28년(9년) 8월,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로 사신을 보내었다. 사신이 가지고 온
편지를 보던 유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리 선왕인 금와왕께서 그대의 선왕인 동명성왕을 정성껏 보살펴 주셨다. 그런데
오히려 동명성왕은 우리나라의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도록 꼬이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백성을 늘려 나라를 부강케 하려 하는가. 사람도 아이가 어른을 섬기듯
나라도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이제 그대가 예절과 도리를
다해 우리나라를 섬긴다면 하늘이 도와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왕조를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여에서 온 사신에게 하루를 묵어가도록 공손하게 권하고 사신이 물러간 뒤 부여
왕이 보낸 편지를 신하들에게 돌려서 보게 하니 신하들도 울분을 터뜨렸으나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아직 백성도 적고 국토도 넓지 못하오.
군대도 미약하므로 분하더라도 참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소."
  신하들도 할 말이 없어 묵묵부답이었다. 유리왕은 신하들과 같이 회답 편지를 썼다.
  '과인이 구석진 당에 살다보니 예의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이제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날 유리왕은 부여 사신에게 회답 편지를 주었다. 부여국 사신이 기분이 좋아서
돌아가려고 할 때 어린 무휼이 뛰어 들어왔다.
  무휼왕자는 부여국 사신 앞에 당당하게 서서 말하였다.
  "우리의 선조 동명성왕은 어질고 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소왕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대소왕이 이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군사가 많은 것만 믿고 우리 고구려를 업신여기시다니요. 이것이
예의란 말입니까? 부여로 돌아가시거든 대소왕에게 남의 나라를 칠 생각을 말고
부여나 잘 보살피라고 전해주세요."
  무휼왕자의 말에 유리왕은 깜짝 놀랐다. 부여의 사신도 당도한 무휼왕자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휼왕자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입을 열었다.
  "대소왕에게 이 이야기를 꼭 전해주세요. 여기 포갠 알이 있어요 대소왕이 이
알무덤을 허물어뜨릴 것인지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인지 묻더라구요."
  사신이 돌아가 대소왕에게 회답 편지와 무휼왕자의 말을 전했다. 대소왕이
무휼왕자의 말 뜻을 물었으나 사신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무도 '알을 포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이때 그 뜻을 알아차린 한 노파가 나섰다.
  "쌓아놓은 알무덤에서는 한 개만 알을 건드려도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왕자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위험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고구려를 쳐들어 간다면
자기가 쌓아놓은 알을 자기가 허무는 격이 될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위험을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대소왕은 무휼왕자의 영특함에 놀라고 말았다. 그때 무휼왕자의 나이 6세였다.
  다음해 6월에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지어 싸우는 일이 생겼다.
그 싸움 끝에 붉은 개구리가 이기고 검은 개구리는 모두 죽음을 당했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이니 부여가 망할 징조야."
  그것을 본 사람들이 수근댔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똑똑했던 무휼은 10세 되던 해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맞아 나가 싸웠다.
  부여는 유리왕 32년(13년) 11월에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유리왕은 무휼왕자에게
명령했다.
  "군사를 이끌고 네가 나가서 부여 군사를 막도록 하여라."
  무휼왕자에게 딸린 군사는 적었다.
  '맞서서 싸우기가 어렵겠다. 계책을 써야겠는 걸. 군사를 산골짜기에 매복시켰다가
적군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려야겠다.'
  무휼왕자의 이 작전은 성공했다. 부여 군사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곧장 골짜기
밑으로 들어왔다. 숨어서 기다리던 고구려군에게 기습을 당한 부여군은 크게 당황하여
고구려군에게 지고 말았다.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 무휼은 태자가 되었다. 그해부터 유리왕을 대신해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돌보았다.
  유리왕이 죽고 난 후 15세였던 무휼태자가 그 뒤를 이어 대무신왕이 되었다.

출처:한권으로 풀어쓴 이야기 고구려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