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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시대를 앞서 간 실용주의자 한고조 유방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처럼 용감하지도 않았고 무예가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늠름한 기상도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재능에서 유방은 항우를 훨씬 앞섰다. 그는 매사에 천재적 판단력을 과시했다.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그의 정치적 자질에는 천하의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소한 감정에 절대 얽매이지 않았고 어떠한 유혹에서도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생존과 승리의 한 가닥 희망이라도 보이면 이를 절대 놓지 않았으며 잔인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유방은 무뢰한 같은 강인함으로 항우의 용맹함을 누르고 찬란한 제국을 건설했다.

 

적룡(赤龍)의 전설

 

기원전 209년 여름 한 차례 큰 비가 지나가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다더냐?”라고 외치며 들고 일어섰다. 진(秦)나라의 폭정에 넌더리가 나 있던 백성들은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호응했다. 오래 전부터 공경대부만 출입이 가능했던 조정의 대문이 누구에게나 개방되고 심지어 황제의 보좌도 얼마든지 넘볼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하여 갖가지 이상과 포부를 품은 자들이 하나 둘 난세로 쏟아져 나와 서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해 기염을 토하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개막 되었다. 그런 와중에 무수한 영웅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갔고 최후의 승리자가 된 것은 절대 영웅으로는 보이지 않는 인물인 유방이었다.

 

기원전 256년 유방은 패현(沛縣)의 평범한 농가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기원전 254년이 지나 그는 한나라의 개국황제가 되었으며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주원장과 더불어 출신이 가장 미천했던 인물로 꼽힌다.

 

유방의 탄생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적룡 전설이다. 유방의 어머니가 번개와 뇌성이 요란한 어느 날 밤 꿈에 적룡을 보고 유방을 잉태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다른 이야기 에서도 적룡이 등장한다. 유방은 언제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하면 그대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집 주인은 적룡 한 마리가 유방이 누워있는 위를 맴도는 광경을 목격했다. 기이하게 생각한 술집 주인은 그때부터 유방에게는 술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담한 사나이

 

유방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성공에 필요한 선천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이 하급관리인 사수정장(泗水亭長)으로 있을 당시 진시황의 위풍당당한 어가 행차를 보며 유방은 감개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저 정도는 해봐야지!”

 

그의 이 한 마디는 훗날 사람들의 진취성을 북돋아줄 때 인용하는 명언이 되었다. 사실 호언장담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장담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방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큰 뜻을 품고 거침없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당시 상당한 명망을 자랑하던 여공(呂公)이 유방이 살고 있던 패현으로 이사를 왔다. 그러자 현에서는 잔치를 열어 여공을 환영했다. 많은 사람이 인사를 하러 여공의 집으로 몰려왔는데 이때 사회를 맡은 소하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천문이 안되는 축하 선물을 가져온 손님은 당하 앞에 앉으시오.”

 

당시 유방은 단 1문의 선물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당하에 앉기는 싫었다. 그는 갑자기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1만문을 가져왔소이다!”

 

그 말에 사방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유방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지기 전에 집주인인 여공은 유방의 호탕한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여공은 유방을 귀빈석에 앉게 하고는 유방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는데 생김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귀인의 상이었다. 결국 여공은 주연이 끝난 후 유방을 불러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유방으로서는 당연히 쾌재를 부를 일이었지만 여공의 부인은 남편의 처사가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러나 여공은 부인의 불평에 껄껄 웃기만 하였다고 한다.

 

유방의 거사

 

유방은 조정의 명령을 받고 인부들을 인솔하여 여산여산(驪山)으로 황릉을 축조하러 떠났다. 그런데 도중에 달아나는 인부들이 속출하였고 나중에는 대부분이 달아나고 겨우 몇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가 봤자 이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유방은 그나마 몇 명 남은 인부들도 모두 놓아주고 스스로도 도망자 신세가 되기로 했다. 인부들은 유방의 행동에 감명을 받아 십여명이 유방을 따라 나섰고 다른 도망자들과 일부 젊은이들이 합세하면서 유방은 순식간에 도망자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은 거사를 일으켜 ‘장초’ 정권을 수립했고 패현의 현령은 병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고자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의 건의를 받아들여 번쾌(樊噲)를 보내 유방을 불러들였다. 그러나 유방이 100여명의 무리들을 이끌고 패현으로 돌아오자 현령은 갑자기 유방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문을 닫아걸고 유방의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소하와 조참마저 죽이려 했다. 소하와 조참은 급히 성을 나와 유방에게로 몸을 피했다. 이때 유방은 편지 한 통을 화살 끝에 매달아 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 편지는 현령의 비리를 고발하는 한편 성 안의 백성들에게 현령을 죽일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평소 유방에 대해 익히 들어왔던 성 안의 원로들은 유방의 말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그들은 당잔 현령을 죽이고 성문을 활짝 열어 유방과 병사들을 맞아들였다. 그리고 모두 유방을 우두머리로 추대하며 ‘패공(沛公)’으로 칭했다. 유방은 이를 사양하려 했으나 원로들은 기어이 유방을 추대하려 했다. 소하, 조참, 번쾌는 모두 이때 유방의 수하가 되었다. 유방의 군대에는 백성들이 가세했고 순식간에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초한쟁패의 서막이 오르다

 

기원전 206년 8월,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關中)으로 쳐들어갔고 진왕(秦王) 자영(子拏)이 유방에게 투항하면서 진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항우가 동쪽에서 진나라의 주력부대와 싸우는 동안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 진입한 유방은 휘황찬란한 궁전과 산더미 같이 쌓인 금은보화에 넋을 잃었고 이제 이곳에서 평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때 한창 들떠있는 유방에게 번쾌와 모사 장량(張良)이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했다.

 

“패공, 눈 앞의 부귀영화에 빠져서 원대한 목표를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들의 충고에 유방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유방은 모든 재물을 봉해둔 채로 궁이 아닌 군영으로 돌아가 거주했다. 이런 유방의 태도에 부하들은 모두 기뻐했다. 자신들이 따르는 인물이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정신 못 차리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우의 모사 범증(范增)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큰 포부를 가진 유방이 장차 두려운 적수라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범증은 항우에게 하루 빨리 유방을 죽여 없애라고 간언했다.

 

이때 유방은 함양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들을 모조리 폐지하고 그 유명한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선포했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경중에 따라 죄 값을 치르게 한다는 법률이었다.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진나라의 무자비한 법들을 폐지하고 억눌린 백성들의 숨통을 터줌으로써 민심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유방의 정책은 관중 백성들의 큰 호감을 얻었다. 사람들은 유방의 군대를 위로한다고 술과 고기를 싸들고 다투어 찾아왔다. 그러나 유방은 원로들이 가져온 모든 선물을 정중히 사양했다. 이에 더 감동한 원로들은 유방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사람들은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유방이 관중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한편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함곡관(函谷關)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방에게 함양을 빼앗긴 것 만으로도 기분이 나빠 있었는데 유방이 왕을 칭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 같이 화가 나서 당장 유방을 처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홍문(鴻門)의 회(會)

 

항우는 군대를 정비하고 장수들을 소지하여 유방을 치러 갈 준비를 했다. 당시 유방이 거느린 군사는 약 10만, 반면 항우가 거느린 군사는 40만에 달했다. 이대로 싸운다면 결과는 자명했다. 그런데 이때 유방에게 수호천사가 나타났다. 바로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었다. 그는 유방의 모사인 장량과 친밀한 사이였다. 이대로 양군이 싸운다면 장량도 또한 위험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고 이에 마음이 걸린 항백은 말을 달려 장량을 찾아가 어서 몸을 피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장량은 자기 혼자 살기 위해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유방을 변호하는 말을 하더니 아예 항백을 데리고 유방을 접견하러 갔다.

 

유방 역시 항백이 자신을 구하러 온 인물임을 알고는 극진히 대접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자식들의 혼사까지 약속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항우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유방에게 완전히 설득당한 항백은 돌아가서 항우에게 유방의 말을 그대로 전해주며 유방을 변호했고 단순한 항우 또한 그 말에 바로 설득 당했다. 항우는 유방을 치려던 계획을 취소했고 다음 날 새벽 유방은 수행원 몇 명만 데리고 항우의 군대가 있던 홍문을 찾아왔다.

 

유방은 항우를 만나자 그 자리에서 어젯밤 항백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고 비굴한 태도로 자신은 절대 항우와 천하를 다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있노라니 슬며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 유방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 오직 범증은 유방을 그 자리에서 살아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항우에게 눈짓을 하며 그를 죽이라고 했지만 항우는 못 본 척 눈을 돌려버릴 뿐이었다. 그러자 범증은 아예 무사 항장을 시켜 검무를 추는 척 하고 유방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장량은 번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번쾌는 연회장에 뛰어 들어가 유방을 보호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유방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와 자기 군영으로 되돌아갔고 유방 일생일대의 위급한 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항우를 물리치다

 

홍문의 회 사건이 있은 직후 항우는 군대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했다. 그는 전쟁터에서는 용맹하고 천하무적이었지만 막상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는 별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불합격이었다. 다른 사람의 간언을 듣기 싫어했고 민심을 휘어잡는 방법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의 행위를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못했다. 진나라가 무너지고 이제 새 나라를 세워야 하는 그때는 우수한 건설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항우는 건설자라기 보다는 가는 곳 마다 파괴자의 모습만 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투항한 진나라 군사 20만명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함양에서는 진나라의 궁전을 불태우고 진왕 자영마저 죽였다. 그의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고 항우의 군대가 지나는 곳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려왔던 백성들은 항우의 횡포에 다시 시달리게 되자 실망이 극에 달했다. 이미 항우와 유방의 힘겨루기에서 항우는 유방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팽성(彭城)에 도읍하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한 항우는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하고 파촉(巴蜀))과 한중(漢中)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유방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먼 길을 가야만 했다. 도중에 향수병에 걸린 군사들은 하나 둘 달아났고 급기야 믿었던 소하마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유방은 갑자기 막다른 길에 몰린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낙담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하가 돌아왔다. 게다가 낯선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그 사람이 군대를 훌륭하게 통솔할 수 있는 인재라고 소개하며 반드시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하가 소개한 인물은 바로 한신(韓信)이었다.

 

그 뒤 항우가 공동 군주(君主)로 추대하고 있던 의제(義帝)를 살해하자 유방은 이것을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항우와 천하를 다투는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장장 4년이나 계속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유방의 세력이 훨씬 작았기 때문에 수차례 항우에게 밀렸지만 전쟁의 승패는 군사들의 수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유방은 항우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도 지적인 면에서 항우보다 훨씬 앞섰다. 따라서 양측의 대결 구도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02년이 되자 항우의 부대는 해하(垓下)에서 마침내 유방의 대군에 포위되었다.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항우는 포위를 간신히 뚫고 오강(烏江)으로 달아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까지도 항우는 자신이 유방에게 왜 졌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자신을 유방에게 무릎 꿇게 했다고 다음과 같이 원망하며 죽었다고 한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로다!”

 

한나라 개국과 통치

 

기원전 202년 유방은 황제에 오르면서 한나라를 개국했고 수도는 장안(長安)으로 정했다. 유방은 자신이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성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폭정으로 망한 진나라를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극히 온화한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건국 무렵의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몇 가지 개혁 조치들을 실시하여 정상적인 생산 활동을 회복시켰으며 사회 질서를 바로 잡았다.

 

첫째, 논밭에 대한 조세를 과감하게 줄여 세율을 15분의 1로 낮추었다. 백성들이 쌍수를 들고 기뻐한 것은 말한 것도 없었다.

둘째, 당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은 굶주리다 못해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했는데 유방은 그런 사람들을 모두 평민 신분으로 회복시켰다.

셋째, 군대에서 세운 공에 따라 논밭과 집을 나누어 주었다.

넷째, 난리통에 숨어살던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돌아와 살도록 호소하고 원래 거주지와 논밭의 소유권을 회복시켜 주었다.

다섯째, 많은 사람들에게 농업에 종사하도록 권하고 상인의 지위를 크게 제한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비친 상인의 모습은 스스로 신발 한 짝 못 만들면서 상품을 사서 되팔기만 하는 쓸모없는 집단이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통치체제는 관제의 경우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했으나, 지방통치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郡國制)였다. 그는 한나라 건설에 공이 큰 부하장수들과 친인척들을 제후(諸侯), 열후(列侯)로 봉해 각지에 내보냈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공이 컸던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 등의 공신 제후들을 모두 처형하고 제후는 한나라의 황족에 한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아마도 유방은 진나라처럼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광대한 국토를 믿을만한 사람들 즉 친척들에게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러나 이 제도는 유방의 대표적인 실정으로 여겨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유방은 자신이 죽은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중앙정부를 위협하게 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유방이 죽은 후 야심만만한 제후들은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정권을 손에 쥐려 했고 경제(景帝) 때인 기원전 154년에 이르러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유방의 실패 사례로 대표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흉노(匈奴) 정벌이 그것이다. 흉노는 중국 북부에 사는 유목민족으로 진나라 말부터 여러 번 남하하여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바로 이 흉노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이었다고 하니 당시 중국인들의 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무렵 북방의 흉노는 선우(單于)인 모돈(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오르도스(Ordos) 지역의 백양과 누번을 병합하는 등 세력을 급격히 키워가고 있었다. 유방은 이를 몹시 경계하여 측근인 한왕 신(韓王 信, 건국 공신 한신과 이름이 같기 때문에 중간에 王자를 넣어 부름)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했다.

 

그러던 기원전 200년 신생 한나라의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흉노 토벌을 맡긴 한왕 신이 토벌이 어렵다 생각하여 화평을 시도했는데 이것을 안 유방이 이를 반란이 아닌가 의심하여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해 버린 것이었다. 토벌 임무를 맡기고 보냈는데 도리어 투항해 버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흉노의 모돈은 그의 인도를 받아 한나라의 대(代)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의 평성(平城)에 이르렀다.

 

분노에 찬 유방은 기원전 200년 직접 32만 대군을 일으켜 흉노 토벌에 나섰다. 신하였던 유경(劉敬)은 흉노와 싸워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유방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평소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간언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유방이었지만 이때만큼은 감정이 이성을 앞서 버린 듯 했다. 기세등등하게 원정을 감행했지만 결국 유방은 크게 패하여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칠일 동안이나 그렇게 포위되어 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후에야 유방은 흉노와 화친을 맺었다. 유방이 이때 맺은 굴욕적인 화친 조약은 두고 두고 한나라에 짐이 된다.

 

유방의 일화들

 

유방은 시정잡배 출신으로 놀고 먹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그는 결코 자신의 이상을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혈육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유방이 항우의 대군에 쫓기는데 마차가 무거워 빨리 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게를 줄이려는 생각에 유방은 갑자기 마차에 타고 있던 자식들을 마차 밖으로 밀어냈다. 유방의 부하들이 아이들을 다시 구해왔지만 유방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이들을 밖으로 밀어내 버렸고 다시 부하들이 아이들을 구해 와야 했다.

 

한번은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사로잡았다. 유방에게 그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겠다고 협박했지만 유방은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초 회왕의 부하로 있으면서 형제의 언약을 맺었으니 내 아버지는 공의 아버지이기 하오. 굳이 아버지를 삶겠다면 내게도 그 국 한 그릇을 나눠 주시오!”

 

이 말에 화가 난 항우는 그 자리에서 유방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지만 항백이 나서서 그를 만류했고 유방의 아버지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다면 유방은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감정이 앞서는 항우는 그런 유방에게 도무지 어떻게 대항해야 좋을지 몰랐을 것이다. 둘의 이런 차이가 결국 시정잡배를 황제로 만들고 무적의 영웅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다

 

과거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툴 때는 자신의 목숨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유방이었지만 정작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 후에는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유방은 말년에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병이 날로 위중해지자 황후인 여후(呂后)가 명의를 부르고자 했으나 유방은 이를 말리며 말했다.

 

“일개 평민에 지나지 않던 내가 천하를 얻었으니 이는 하늘의 보살핌이 아니겠소? 살고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내 목숨이 여기까지라면 아무리 명의가 와도 소용없소.”

 

여후는 유방이 며칠 못 살 것으로 보고 소하가 죽으면 누구를 상국에 앉힐 것인지 물었다. 유방은 조참에게 그 뒤를 잊게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방은 조참의 뒤를 이을 인물로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을 미리 정해 놓았다. 그들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늙어서도 여전했다. 훗날 이들은 외척인 여씨의 세력들이 커지자 이들을 제거하고 한나라를 안정시켰다.

 

유방의 일생은 원대한 포부와 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시의 능력이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유방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장량, 소하, 한신, 진평 등을 등용하여 한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자신이 항우보다 못한 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또한 항우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강점을 이용할 수 있는 부분에서만 항우에 맞섰다. 항우가 아무리 비웃고 멸시해도 섯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예나 체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고 어떠한 어려움이나 유혹에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유방은 시대를 앞서간 실용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런 하오즈의 <제왕의 길>


네이버 지식인에서 찾은 todmsgml7942 님의글.

십팔사략에 기록된 한 고조 '유방'은 그의 먼 후손 '유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고우영 작가에게 아마도 그렇게 해석되었는지 모른다. 고우영 십팔사략에 유방의 장점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했다. '화'를 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다. 그리고 받을까 말까를 결정한다. 이 점 유비도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고우영 삼국지(원작자 나관중)에서 유비는 '귀가 큰' 사람으로 나온다. 잘 듣는다는 의미다. 화를 안내는 것이 유방과 비슷하다.

 

'한나라' 유씨의 특징이었을까. 이 넓은 '아량' 덕분으로 글자 그대로 '면 단위' 벼슬에 머물러 있던 유방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그 중 '역사'에 기록된 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장량과 소하 그리고 한신이다. 후방의 근거지를 관리하면서 군량을 대고 군사를 길러 보급을 담당하는데 소하만한 인물이 없다고 유방이 칭찬했다. 마찬가지로 천리 먼곳에 떨어져 '장막'안에 기거하며 작전을 수립하고 펼쳐나가 승리를 이끌어 내는데 장량만한 인재가 없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한신'에 대하여는 안 그랬다. 대신, 감정을 가졌거나 '라이벌' 의식을 느꼈거나 그랬을 법 하다.

 

아니, 여기에 이르르면, 유방과 유비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바로, 대업을 이룩하고 나서의 '태도'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유방의 '화 안내고 통큰' 도량이 일단 대업을 이룩하고 나니 바뀌어 버렸다. 그의 핵심 참모진과 장군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했다. 가장 큰 원인은 '여태후'였다. 그러니까, 대업을 이룩하는 과정속에서, 유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하늘 위에 '청룡'의 이미지를 보게 되어 끊기지 않고 보급을 담당했던 여태후가, 일단 대업을 이룩하자 글자 그대로 '전제자'로 권력을 배후에서 휘두르게 된 것이다. 물론 유방이 죽고 나서는 아예 '여태후'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휘두르면서 '여씨 천하'를 이룩하게 된다. 

 

유비의 경우는 그의 핵심 전략가 '제갈 양'에게 '양위'의 뜻까지 비칠 정도로 '진정'어리게 어진 사람이었다. 귀 크고 남의 말 잘 듣고 끝까지 기다리고 '거저' 아무것이나 주워먹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어진 '군주'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물론 '소설'적으로 각색되었을 것이다. 십팔사략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가까우니 좀 더 사실적일 것이다. 십팔사략에서 유방과 유비는 이렇게 다르다. 유비는 자신의 장군과 참모중에서 단 한 사람도 죽이거나 제거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봉추선생 방통은 작전중에 전사했는데, '말'이 놀라서 쓰러지자 유비가 자신의 백마를 내줬기 때문에 '낙봉파'에서 '유비'로 오해 받아서 집중 화살 사격에 죽었다. 주군을 대신해 죽은 셈이다. 제갈양은 단 한번 유비의 뜻을 거슬렸었는데, 바로, 오나라와의 연합을 깨는 '관우' 보복전쟁이었다. 이런 종류의 전쟁이 승리를 이끌 리 만무했다. 허나, 유비와 장비, 관우의 관계를 잘 아는 제갈양은 결사 반대가 불가했다. 바로 이때가 단 한번, 군사와 주군이 의견 불일치 시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비의 '보복' 전쟁 군대의 군사는 '법정'이 맡았다고 한다. 나중에 패전하고 돌아와 죽음에 임박한 유비가 제갈양에게 사과하면서 '양위' 의사를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는 이런 곳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제갈양이 양위를 거절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번의 '출사표'는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었다. 그 스스로 제위를 탐내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나라 전체를 이끌어 나간 사람이 제갈양이었으니 정말 대단하다. 그의 주군 유비가 너무도 통큰 사람이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비 진영에서는 결국 위나라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말지만 단 한 사람도 대업을 이룩한 이후 숙청되거나 제거되지 않았다. 

 

허나 유방은, 그의 손아래 동서 번쾌까지 죽였다. 그래서 장량과 소하, 한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순서가 왔다. 가장 결정적인 제거는 한신이었다. 한신때문에 '토사구팽'이 나온 것이다. 유방이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면 토사구팽의 전설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십팔사략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에는 '묘미'가 있다. 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은 그에게 '솔밭 정'자 삼정립 구도를 제안했다. 그것이 아니면 살아날 길 없다는 얘기도 했을 것이다. 유방이 한신을 죽이게 된 것은 여태후의 배경도 있었지만 아마 이런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나라 왕으로 '출사'를 명령했을때 응하지 않은 전력도 작용했다. 언제든 한신이 마음만 먹으면 제나라를 근거지로 '독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장량이 전략가였고 실병력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신은 요컨대 삼국지의 '주유'와 비슷한 인물이었다. 장량과 더불어 전략가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유방의 후손 유비가 다시금 근거지로 삼게 되는 '촉'으로 들어와서 잔도를 불태워 버리는 전략 행위의 의미를 꿰뚫어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100만 대군도 가볍게 지휘하는 출중한 역량이었다. 사실 '토사구팽'의 원인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질문했다. 그대가 볼때 나는 어느정도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오? 10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대는 대체 얼마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소? 많을 수록 좋습니다. 10만과 다다익선이라는이 '대답'이 크게 비정치적이었고 비외교적이었다. 이런 '자만심'의 드러냄도 토사구팽에 한 몫한 것이다. 다음 질문과 대답으로도 앞의 감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그런 내가 그대를 수하로 거느리는 까닭은 무엇이요? 그게 저와 폐하의 다른 점인데, 그 드넓은 도량으로 장량이나 소하, 저 같은 참모와 장군을 거느리시는 역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합니다. 하하하. 유방이 만족했지만 옆에 여태후는 불만이었다. 

 

반면 소하는 '상국'이라는 중국 역사상 단 한번뿐인 벼슬에 오른다. 요컨대 황제와 맞먹는 '승상'이라는 의미 아닌가. '지록위마'로 유명한 환관 조고는 스스로 '상국'을 칭했다고 한다. 단 한번뿐이라는 것은, 재상 소하가 중국사에 나오는 여러명의 명재상 중에서 가장 공로가 크고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요즘말로 '행정의 달인'이었다는 것인데, 한국에는 '고건'이라는 사람이 이런 칭호를 들었다. 단지 '행정의 달인' 만이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있어서, '촉'에 진입한 유방의 군사속에 끼어든 '한신'이 떠나려 했을때 붙들어온 사람이기도 하다. 소하가 한신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유방의 대업은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유방은 대단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간단히, 유방은 후방을 안심하고 소하에게 맡긴채 어디든 출정이 가능했다. 소하는, 제갈양 만큼이나, 별다른 야심 없이 그저 주군 유방에게 충성을 다했다. 군대의 양성과 보급 이것이 소하의 책임이었고 어김없이 일을 잘해 냈다. 그야말로 '상국'의 칭호를 얻는데 여태후의 반대같은 것도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뒤탈 같은것 생기지 않게 잘 챙겼다는 것이다. 탁월한 능력과 처세가 어울려 여태후같이 까칠한 전제자의 칼날을 피해갔다.

 

마지막으로 장량이 있다. 제갈양과 달리 행복한 전략가였다. 제갈양은 소하와 장량 그리고 한신까지 겸했다. 제갈양이 북벌을 시작할 무렵에 믿음직한 장수로 마씨 형제들중 마속이 가장 뛰어났지만 그의 직계 장군이었던 조자룡에 턱없이 못미쳤다. '작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호로곡에서 북벌을 망치고 '읍참마속'의 고사를 만들고 말았다. 반면 장량은 제갈양처럼 후방의 군대양성이나 보급 등은 소하가 다 해결해 주었고 작전의 수행은 한신이 해결했기에 '전략적 정치'만 하면 되었다. 장량의 전략적 판단은 제갈양 못지 않다. 유방은 이렇게 뛰어난 세 사람이 역할분담을 잘 해낸 덕분에 이 세사람만 잘 통솔하면 만사가 다 되었다. 게다가 세사람중 누구도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든지 그런 야심이 없었다. 장량은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던 한나라 사람이었고 한신도 그랬다. 이들의 목표는 한나라의 재건과 부흥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다. 한신이 만일 더 큰 야심이 있었다면 괴철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한나라'를 복원한다는 정도로 목표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량이 유방에게 한나라 부흥의 꿈을 위탁하기로 결심하고 한신에게 찾아가서 '출병'을 요청했을때, 여기 응한 이유였다. 괴철의 삼정립 구도를 물리치고 유방을 한나라 황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소하와 장량, 한신 모두 스스로 일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 같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유방이 그래서 복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장량은 창업에 성공한 이후 스스로 떠나는데,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다, 창업이후에 대하여 잘 알아서였을 것이다. 재계로 진출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있다.

 

유방이 창업과 더불어, 유비 정도로만 어질었다면 한나라 역사가 좀더 순탄했을 것이다. 여태후의 폭정이 여씨 일족에 의한 한나라 황실의 장악으로 이어지면서 백성들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유방의 참모중 진평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몫이 유씨 천하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여태후가 죽으면서 진평은 그 일을 해냈고 한나라는 당대 로마와 더불어, 아시아의 제국으로 등극했다. 어느때보다도 평화롭고 좋은 한시절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구비를 만든다. 중간에 왕망의 신나라가 끼어드는 덕분에, 유수라는 그야말로 '유수의 인물'이 다시금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유수는 유비와 한신을 합친 정도의 인물이었고 정말 훌륭한 군주였다. 그래서 유수 이야기는 새롭게 써야 맞다.


여기서 토사구팽이란...?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죠.

 

 유래는 

《사기(史記)》〈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한(漢)나라 유방(劉邦)과 초(楚)나라 항우(項羽)와의 싸움에서 유방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한신(韓信)이다.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한신을 초왕(楚王)으로 봉했으나, 언젠가는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염려하고 있었는데, 마침 항우의 장수였던 종리매(鐘離昧)가 옛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일찍이 전투에서 종리매에게 괴로움을 당했던 유방은 종리매를 미워하고 있었다. 그가 초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자, 유방은 종리매를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은 차마 옛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 사실을 상소한 자가 있어 유방은 진평(陳平)에게 상의했다. 진평의 책략에 따라 유방을 운몽(雲夢)에 행차하고 제후들을 초나라 서쪽 경계인 진(陳)나라에 모이게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한신은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진해서 배알하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에 술수가 남다른 가신이 한신에게 속삭였다.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배알하시면 천자도 기뻐하시리다.”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말을 종리매에게 했다. 그러자 종리매는 “유방이 초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자네가 나를 죽여 유방에게 바친다면 자네도 얼마 안 가서 당할 것일세. 자네의 생각이 그 정도라니 내가 정말 잘못 보았네. 자네는 남의 장(長)이 될 그릇은 아니군. 좋아, 내가 죽어주지.” 하고는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한신은 자결한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가서 유방에게 바치지만, 유방은 한신을 포박하게 했다. 그래서 화가 난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도 잡혀 삶아지며, 높이 날으는 새도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모신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함이로다[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교토사양구팽은 교토사주구팽(狡兎死走狗烹) 또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도 한다.